오태원, 《 9시 17분, Drops 》

 

 

 

[리뷰] PUBLIC ART

 물의 형태, 생명의 모양

<오태원_9시 17분, Drops>전
2.2-2.27 스페이스. 55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말을 물질적으로 화신(化身)하는 사물의 그 물질성도 함께 사라질 때, 시라는 이름을 가진 미의 기적이 일어난다.” – 황현산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 중에서

오태원의 개인전 <9시 17분, Drops>는 자신이 태어난 시간과 작가의 시그니처라 부를 수 있는 형상인 ‘드롭스(Drops)’를 연결한 전시이다. 2010년 즈음에 탄생한 물방울 형상의 드롭스는 조금씩 형태가 다듬어지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전시장에는 여러 유형의 드롭스가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입구 왼편의 가장 규모가 큰 드롭스는 천고가 낮은 전시장의 물리적 한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억지로 틀어넣은 이불장 속 베개처럼 공간에 끼워져 있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전시 초반에는 더 팽팽한 상태로 공간과 힘겨루기를 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롭스의 공기가 서서히 빠지면서 전시 공간 속에 기체의 시간이 혼합된다는 상상을 일으켰다. 대부분 드롭스는 공기를 주입한 풍선으로 제작되지만, 물성이 강한 시멘트와 같은 질료를 이용한 혼합매체로도 만들어진다. 왼쪽 구석에는 황금색으로 표피의 드롭스가 위치하는데, 그 정면에 위치한 영상이 반사되면서 검은 공간이란 착시효과가 발생한다. 황금 드롭스 표면에 맺힌 검은 공간은 시각적인 액자구조(mise en abime)를 만들어냄으로써 화려한 황금색 너머의 어두운 그림자 세계를 드리운다. 무엇보다 영상에서는 드롭스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이 투사되고 있었다. 불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지만, 드롭스는 의연하게 이 화형식을 견뎌내고 있었다. 황금색 맞은편 공간에는 드롭스의 장례가 열리고 있었다. ‘장례’라는 표현이 적확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물망 밑에 타버린 재처럼 널브러진 드롭스의 표피는 빛에 의하여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 개의 드롭스 설치와 영상 작업 사이에는 그물과 비즈로 제작된 다수의 목걸이 더미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굳이 전시를 세밀하게 서술한 이유는 오태원의 예술은 각각의 작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업이 공간 내부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시각적 스펙터클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어떤 연극적 정서 내지는 상태를 끌어낸다는 점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작업이지만 각각의 재료들의 색채와 질감 그리고 전시를 보다 극적으로 변신시켜주는 조명의 힘이야말로 오태원 작업이 가진 매력적인 측면이다. 한국 미술계는 벌써 십여 년 전부터 다원 예술에 대한 기대에 힘입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실상 적지 않은 다원 예술이 실제로 다원적이라기보다는 융합 내지는 혼성에 더 무게를 둔 실험(experimental)에 그친 게 아닌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한국미술계에서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진적인 유행과 정책 지원이 실상은 창작 활성화를 위하기보다는 예술의 세계화에 편승하기 위한 화학적으로 근육을 단련하려는 엉큼한 속셈 때문일 것이다. 한편 오태원의 공간연출 방식은 설치미술에 바탕을 둔 조형적 드라마터그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전시 표제부터 내용적 측면을 살펴보자. 과연 작가는 자신의 탄생 시간과 드롭스를 연결 지음으로써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가 작업의 형태와 화려한 표면에 눈이 멀어서 놓친 게 있지는 않을까? 서서히 공기가 빠지는 드롭스, 타오르는 불꽃 위에서 의연히 존재를 지탱하는 드롭스,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묻는 듯한 황금색 드롭스, 마지막으로 처연하게 모든 숨을 다 뱉은 후 남겨진 드롭스의 검은 표피까지. 이 전시는 물, 불, 흙, 공기의 순환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건드린다. 그렇게 물방울 형상은 관습적인 상징성에 머물지 않고 물이 품은 생명의 가치를 질문한다. 글 서두에 인용한 황현산 선생의 글처럼 사물의 물질성이 함께 사라질 때를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미적 기적을 원한다면 말이다.

● 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