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

실격

1 표류하던 나는 기념비가 된다.

잃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의 흔적은 저 어둠속에서 새어나오는 티브이 단막극의 빛보다 더

빨리 사라져갔다. 사실 손에 쥔 게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내가 얻은 경험을 무척 소중히 여

겼고, 또 그것들을 지킬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 이후 나는 도무지 회

복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개요와 순서를 설명하기에는 높고도 진부한 외

곽의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검고 습한 벽이었다. 그 벽 사이로 나온 입들에서는 오

로지 동정 받지 못할 어느 인생을 향한 그들 각자의 상상이 난무했다. 배경은 사라지고 인물

에 대한 자의적 해석만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이상한 배열이었고 실패한 플롯이었다. 그들

이 알고 있다. 말하는 이야기 위에 또 다른 나의 태도와 입장이 등장했다. 나를 찾던 이들로

부터 창조된 사실은 더 이상 나를 알려하거나 묻지 않았다. 나의 대지는 완벽히 타들어갔다.

나는 완벽하게, 새롭지 않은 사건이 되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던 훈련된 이성이 자아와

함께 무너짐과 동시에 어린아이도 아닌 갓난것 모양 눈 뜨고 숨 쉬면서도 다가올 내일을 거부

하지 못한 채- 지금 위에 부표가 된 나는, 말 그대로 이율배반의 삶이다.

2 무색의 운동들

– 운동화 끈

1차원적 의미가 더 이상 숨 쉬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자살은 한 인간이 선택한 최선의 고요

이고 용서받지 못할 저주이자 돌아오지 못함에 대한 엄숙, 물리적으론 호흡하는 생명체 스스

로 그 활동을 정지시켜 원상태도 돌아오지 않는 행위이다. 원망과 연민이 잠시간 이어지나 찰

나에 불과하다. 개인에게 주어질 최선의 비극은 도덕적이지 못한가. 내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

다는 유구한 학문적 가설들을 불신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생의 연속성에 일부라는

기대와 희망, 그 안도 끝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있던 나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

다. 그에 따른 용기와 호흡하는 두려움이 만든 ‘그럴만한 가치가 있던 생인가’라는 자조적 결

정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세상의 표면엔 최소한의 두려움이 남긴 질량만이 남는다.

 

3 그녀는 기차역을 마주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세계는 구성원들에게 긴 암흑 속 터널과 같은 고유한 절차를 거치기를 권고

해왔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각기 이동이 주어졌다 위험하고 눅눅한 그 통과의례를 어떤 사람

들은 돌아간다는 핑계로 거절 또는 외면했다. 하지만 우울과 절망이 녹아든 도처에서 사람들

은 도저히 생경한 자가 되기를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이 같은 과정들이 지속해서 번복되는

까닭은 보편성을 간과한 개인의 윤리적 판단 결여로 인해 도덕적 자아의 내용이 실추되기 때

문이라고 도시의 매체들은 말했다.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행하려는 사람을 도울 묘책은 문명

속에 없다고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계기를 통해 사회적 요구가 강요로 바뀔 때마다 그들의 자

기결정권은 의미를 상실했다. 그런 강제로부터 ‘실격’은 그녀 내부에서 이루어진 재량권과 같

았다. 외부의 폭력적 유물(기차역)의 위협에 갇힌 실재에게 방어기제란 기차에 오를 결정을 유

예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결연했기에 역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어

지러운 광장의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궁극적 사건(강제이주)은 끝내 없었다. 그녀에게 마침표

란 의미의 끝이 아닌 방점, 하나의 이야기를 평화롭게 연장하겠다는 머리와 꼬리가 맞물린

‘평행선언’이었다. 개인의 종말이나 종착역 따위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는 그

렇게 실추될 수 있던 격을 오롯이 잃었다.

 

4 사라질 수 없는 자들은 Digital Tombstone이 된다

잠들지 않는 호모 디기탈리스들이 순례자를 대면하는, 이 외딴 모퉁이는 허구의 성지이다.

더 이상 재현되지 않을 평범함이 끊임없이 재생하는 들판, 실체를 읽을 수 없는 초상들이 저

어딘가 우리와 맞닿아 있다.

 

강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