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

 

심현희 개인전 <수평> | 시선의 지향

자물쇠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아름다운 소녀 데보라를 벽구멍으로 지켜보던 누들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름답고 갖고 싶은 대상이어서 일까. 호기심에 이끌려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자신이 본다는 것을 간파당하고 만다. 간파된 다음은? “부끄러움이 나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나는 이 존재‘로 있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넘어서 어떤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이 나’이다. 더욱이 나는 타자가 나에게서 빼앗아 타유화(他有化)한 하나의 세계 속에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이 나’이다.”

오래전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이 자물쇠 구멍의 일화를 읽었다. 사르트르의 대자존재, 대타존재는 어느새 휘발되었지만 자물쇠 구멍만이 오롯이 남아 잊혀 지지 않는다. 순수하게 보는 나는 그냥 나다. 관음을 들키고 난 후 나는 내가 된다. 그(녀)로부터 내가 된다. 철학과 사유는 잠시 내려놓더라도 얼마나 당혹스러운 순간일지 시선을 던져보았고 받아보았던 이들은 안다. 그리고 내가 된 순간의 뜨거움을 잊을 수 없다.

열쇠 구멍은 가로막은 벽(문)에 난 실낱같은 통로다. 시선은 바로 이 벽 앞에서도 끈질겨서 빈틈을 찾고 만다. 시선은 이토록 지향(指向)이 있다. 바로 이 시선의 지향에서부터 심현희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본다. <방 안쪽_에서>, <방 안쪽보다 더 깊은 곳_에서>, <거실_에서>, <창가_에서>와 같이 어디에서 어딘가로 향하는 시선이 있다. 작품의 방향성은 주로 실내, 가정에서부터가 다수로 보인다. 혹은 <큰 아들>, <형제>, <부엌_에서. 어둠을 붓는 여자>처럼 대상을 바라본다.

수치심의 순간은 언제 일까. 언제 올까. 내가 되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어쩌면 시선의 지향을 결국 드러내어 놓고 마는 전시와 같은 시간, 장소이지 않을까. 심현희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수평>을 우연히 만났다. 설치가 종료된 그 적요의 시간에, 그 정적의 공간에서 작가는 겨루고 있었다. 버티고 있었을까. 자분자분 작품을 들여다보니 일단의 적요와 정적이 몹시도 불편하여 불안하다. 물이 끓어오르기 바로 그 찰나의 우글거림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듯하다.

사실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작품은 안에서 끓어오르거나 타오르고(<연기>, <꿈>, <폭발>) 그것도 아니면 훈증이 작품 앞을 가로막는 기분(<연기 혹은 안개>)이다. 검고 푸른 물은 뜨거웠던 그 온도를 놓지 않으려고 애써 잠잠해 보이고(<목욕탕에서>) 선홍빛 그게, 실내조명일까 저녁놀일까 아니면 화염에 타오르기 시작했나 조바심이 드는 공간(<거실_에서>)도 아직 위태롭기 직전이다. 허나 「삼초 먼저 보는 여자」가 있는데 ‘세 시간도 아니고 삼분도 아니고 딱 삼초를 먼저 보는 여자’가 있다. 삼초 후를 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심현희 작가의 작품 앞에서 삼초 먼저 보는 기분이다.

「삼초 먼저 보는 여자」의 시인은 일흔 번째 뛰쳐나온 집에 불꽃이 너울거리는 것, 안달루시아 기타의 마지막 줄이 끊기는 것을 삼초 먼저 본 여자에 대해 써내려 가는데, 그래서 그 여자의 불안, 공포, 저주를 명명하는데 다만 다행이라면 심현희 작가의 작품 앞에서의 삼초가 전하는 건 망할 저주의 순간들이 아닌, 옴짝달싹못함 정도일까. 이건 나쁜 얘기 아닌, 뜨거운 얘기다. 뜨거움을 참아가며 그녀의 시선의 지향이, 나의 시선의 지향으로, 그리하여 나 또한 부끄러운 자가되어 섰다. 다부지게 눈을 감고 있는 프로필을 담은 1998년작 <자화상>을 제외하고 최근 이 삼년 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몇 개의 덩어리를 이루며 서로를 간섭한다. <방 안쪽보다 더 깊은 곳_에서>는 검은 입처럼 일렁거리는 수면으로 <방 안쪽_에서>의 덩그런한 침실을 침범한다. 반듯한 방의 벽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이어지는 수평이 그 옆 수면과 공명하면서 안정감은 이내 불안정감과 접속한다. 화염은 <밤바다에비친구름>을 옆지기로 만나 시각적 조응을 이루어낸다. 모락모락 타오르는 불이 물방울이나 얼음알갱이의 점점과 붙으면 급속한 상승과 하강의 빗면이 이루어질텐데 두 작품이 나란하여 아슬아슬하다. 나는 지금 보이는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작품의 군집이 만들어내는 심리나 정서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작품을 내어놓은 작가에 대해 짐작해보는 것이다. 어떤 시선의 지향이 이다지도 울혈진 마음을 낳았을까. 오래 가만 바라보며 노엽기도 집요하기도, 애씀이 있어 다정하기도 할 바라봄이 이 작품들에 있다. 그렇게 느낀다. 대상을 사랑해야만 드러날 수 있는 시선의 끈질김과 끈질겨서 끈적거리는 액체적 시각이 여기에 있다.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 류의 유체의 유동성에 대한 현대적 긍정을 심현희 작가의 작업 세계에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 미셸 세르가 치즈질을 거론할 때의 그 끈적임이다. 관조의 미학이 세상에 정말 가능하다면 아직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혹여 작가가 관조의 미학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아주 오래 더 바라보고 난 후에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나는 심현희 작가의 이 끈적이는 시선을 더 붙잡고 싶고 이 작품들 앞에서 미끄러지듯 발걸음을 떼고 싶지 않다. 오히려 더 뜨거워졌으면,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으면, 많이 부끄러워질 수 있도록 좁은 자물쇠 구멍에 매달린 애달픈 마음과 시선에 부디 더 천착해가기를 부탁하고 싶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에는 모래 구멍 아래에서 마을이 전부 모래에 잠기지 않도록 매일 밤 흘러내리는 모래를 삽으로 퍼내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위독해져서야 모래 구멍 아래에서 결국 나오게 된다. 심현희 작가에 대한 글을 쓰며 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모래를 삽으로 퍼내는 여자의 상황이 떠올랐을까. 모진 고립을 권하는 건 아니고 고립된 작업의 순간이 충전의 시간들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심현희 작가는 불혹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늦은 나이에 작업을 시작한 작가이냐 하면 아니다. 생의 절반을 훌쩍 넘길 만큼 작업의 시간이 길었다. 적절한 시기에 갈무리를 결정하지 못하면 시간이 밀리고, 밀리기 시작하면 완벽의 순간까지 하염없이 지체되기 마련이다. 이제 <수평>에 다다랐다. 그러나 수평(水平)은 희망이다. 미혹되지 아니함(不惑)만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이란 삶에선 현실태가 없다. 그녀가 수평을 제목으로 정했다면 아마 희망에 기대기보다는 요동치는 물 분자를 삼초 먼저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김현주